노무현 정부때 송유관에 대해 이야기하며 정부 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말한 내용 외엔 그저 쇳소리 나는 유명한 노인네 정도로 생각했는데...
나꼼수에서 들은 시원시원한 발언에서 호감을 얻어 그의 책을 읽어 보자고 덤벼 들었더니
이 책, 중용 인간의 맛은 고작 2월 초인데 올해 최고의 책이라고 호들갑을 떨고 싶을 만큼
형광펜으로 도배질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서문부터 '중용을 국민에게'라는 가슴 울리는 제목으로 시작한다.
1장 해설까지 읽으면 대략 1/4 인데
지금까지 놀랍게 느껴진 점은 철학서적이라곤 학교 다닐 때 교과서 조각 글 외에는
거의 읽은 바 없는데(기껏해야 '있음과 없음'같은 강의록 정도)
아무리 쉽게 해설한다고 해도 서양철학과 동양철학 텍스트를 널리 활용하는데
약간 어렵다는 느낌이 들어도 '무슨 말을 전하고자 하는지'는 전달이 되는 놀라운 경험이다. 헐~
암튼 감상은 여기까지 하고 메모 또 시작
내가 서구적 개념으로서의 진보주의자이기를 거부하는 이유는 "진보"라는 말의 배면에는 역사정칙주의의 극심한 빈곤이 깔려있기 때문이다. 나는 역사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역사정칙주의라는 것은 인류 역사의 미래를 확정적으로 예견할 수 있다는 모든 망상을 의미한다. 물론 맑시즘이나 공산주의도 그러한 망상의 한 전형이다. 기독교종말론의 사관이나 헤겔의 변증법적 사관 또한 그러한 망상의 전형임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다.
'나는 역사를 "중용"의 관점에서만 바라본다'
크헉. 무작정 따라해보고 싶은 유치한 추종을 부르는 멋진 말이다. 위 문장은 짧은 배경지식 탓에 정확히 이해는 못하겠다. 다만, 얼핏 선형적 사고에 대한 유치함을 지적하는 듯하다는 ... 역사 책 중에 유일하게 기억하는 '역사란 무엇인가'를 읽었을 때 느낀 놀라운 깨달음이 떠오르기도 하고... 역사는 결국 사가의 해석을 통해 의미를 지니고... 뭔가 확언하지 못하지만 관계가 있는 듯하다.
이쯤에서 나는 엉뚱하게도 종이에 관심이 갔다. 얇으면서 손이 베일 염려도 없고, 유연하여 잘 찢어질 듯 하지도 않는 책 종이. 언젠가 책을 쓰게 되면 꼭 이 종이를 써야 겠다는 김치국(?)도 마셨다.
"중용"이 자유와 평등의 "가운데"일 수는 없다. "중용"은 오직 자유와 평등을 포섭하는 가치로서만 우리의 심성에서 꽃을 피운다.
이 알듯말듯한 문장을 이해시키려고 이후 많은 장이 할애된다.
미국은 땅이 텅텅 비어있는데 반해 중국은 전 땅 덩어리가 사람들로 꽉 차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꽉 차있는 것은 사람뿐 아니라 역사라는 것이다. <중략> 그런데 비하면 미국은 신생국가이다. 어디에든지 위대한 자연은 있는데 위대한 역사의 흔적은 찾을 길이 없다.
그저 사실을 나열로 볼 수 있는데 조금 놀랐다. 내가 갖고 있던 통념속에서 미국과 중국의 위상과 텍스트가 너무 달랐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지구상의 인류는 행복의 기준을 자율적 결단 하에 묶어두지 못하고 주어지는 외재적 대세에 맡겨버리는 뜬구름의 세상을 살고 있다.
젠장... 인류까지 안 가도 나를 포함한 눈에 보이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의 기준을 자율적 결단 하에 묶어두지 못하고 주어지는 외재적 대세에 맡겨버리는 뜬구름의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알았다는 점이 너무나 아쉬워서 틈만 나면 이 사실을 떠들고 다닌다.
미국이나 한국의 경우, 정치권력의 최고지도자를 최대공약수로서의 자유비밀선거에 의하여 선출하는 민주제도를 정착시킨 나라들이지만, 그 결과로 선출된 리더십의 질이 끊임없이 하락하고 있다는 현실에 직면하지 않을 수 없는 데 반하여, 오히려 그러한 민주제도의 소모적 과정을 거치지 않고 주기적인 리더십을 교체하는 방식을 채택한 중국의 경우 리더십의 일정한 퀄리티가 유지되고 있다는 사실을 시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더구나 최고의 권력자라 할지라도 중앙저치국 상무위원회 9명의 집단지도체제의 견제를 무시할 수는 없다. <중략> 우리나라 사람들이 혼동하지 말아야 할 것은, 중국의 "공산당"은 "당"이라는 명사가 붙어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본질적으로 우리가 말하는 "당Party"과는 전혀 차원을 달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중략> 중국 공산당은 국가권력을 초월하는 권력이며 이념이며 당위이다. 따라서 재미있는 사실은 중국의 군대는 "당군"이지 "국군"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중국에 대한 오랜 무지와 FUD를 깨닫는 순간이다. ㅡㅡ;
개혁과 개방에 의하여 경제발전이 진행되고, 일정소득수준 이상의 계층이 의미있는 비율로 증가하고, 다양한 사회집단간의 관용의 요구가 고조되면, 다수의 참여에 의한 정책결정을 선호하는 방식으로 비권위주의적 지향성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
현재 중국 체제가 좋은 결과를 빚고 있지만, 언젠가는 민주주의와 같은 형태로 돌아설 가능성이 높다는 지적.
도대체 순대까지 대기업이 독점하는 사회, 거기서 우리 국민이 얻을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제 몸 버려가면서 물건 싸게 사서 무엇하겠다는 것인가?
시사인 229호 내용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아니 한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한 번 자기의 삶을 반추해보라!
이미 재밌는 독서에 채찍을 더하는 말이다.
제 1 장 천명장 天命章
"중용"에 대한 가장 큰 일반인들의 오해는 그것이 우리의 삶의 자세에 있어서 어떤 행동규범상의 "가운데"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하는 근거없는 통념에 관한 것이다. 나는 좌파도 아니고 우파도 아닌 중용의 길을 걸어가겠다고 호언하는 것은 결국 회색분자도 안 되는 소인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한 "중용"은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는 데 문제의 핵심을 도피하거나, 적당한 타협을 유도하거나, 이것도 저것도 아닌 우유부단한 머뭇거림의 비겁한 방평을 제시하는 그런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공자나 자사는 그러한 "중용"을 말한 적이 없다. 대개 그러한 "중용"의 개념은 서양철학에서 온 것이며, 특히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윤리학 Ethica Nicomachea'을 가득 메우고 있는 언어에 대한 피상적 이해로부터 온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에 대해서 아마 윤리던가 어디선가 무비판적으로 강의하는 선생한테 무비판적으로 들었던 기억(혹은 기억한다는 착각)이 있다.
서구인들이 말하는 삶의 의미는 진정한 삶의 의미가 아닐 수도 있다. 인간을 순수하게 방치하지 못하고 그것에 반드시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모든 논의는 기실 알고보면 인간을 체제나 신화의 질곡 속에 예속시키기 위한 음모이다.
53쪽 읽을 때는 이해하지 못한 듯 한데, 97쪽을 읽은 지금은 이해가 좀 된다. '음모'란 표현은 조금 과하지 않는 싶기도 하지만, '음모거나 세대에 걸친 관성'이 아닐까 하는 ...
우리는 '니코마코스윤리학'을 읽을 때도 "행복 eudaimonia"이라는 말을 현대인들의 심리적 개념으로 전적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행복"은 "기분좋게 몽롱한 심적 상태 a mental state of euphoria"가 아니다. 대개 현대인이 "행복하다"는 말을 쓸 때는 애인을 만나 몽롱하게 기분좋거나, 상을 받아 흥분되었거나 하는 심리적 상태를 표현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유다이모니아"는 심적 상태가 아닌, "성공적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적인 상태가 아닌 동적인 활동 dynamic activity이다.
요즘 '몽롱한 상태'가 아닌 행복감을 느끼기에 무슨 말인지 경험안에서만 체감할 수 있다.
인격적 훌륭함이란 습관 ethos의 축적된 결과로 생겨나는 것이다. 윤리적ethike이라는 말은 습관ethos이라는 말의 형용사형이다. 즉 윤리와 습관은 같은 어원을 가지는 말이다. <중략> 용감한 사람이 되는 것은 용감한 행위를 계속해버릇함으로써 그러한 습성hexis이 생겨나고 그러한 성격상태가 형성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감. 극한 소심의 내가 바뀌는 과정과도 일치한다. 놀라운 진실은 '용기' 대신 '행복'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겠구만.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중용"이란 이런 것이다. 용기는 비겁과 만용의 중용이며, <중략 ... 이후 YY란 XX와 ZZ의 중용이며라는 식의 패턴 반복> 용기라는 덕목 자체가 우리가 삶의 체험 속에서 느낄 수도 있고, 사회적 공감 속에서 어느 정도의 개념적 공통성을 가질 수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렇게 실체적으로 취급될 수는 없는 것이다. 더구나 비겁과 만용의 중간항이라는 양적, 직선적 비교의 대상이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중략> 어떤 때는 비겁한 듯이 보이는 행동이 용기가 될 수도 있고, 어떤 상황에서는 만용이 위대한 용기의 전범이 될 수도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논하는 중용은 일단 영 아니라는 말.
공자의 근원적 관심은 "인仁"에 있었으며, "인"이란 주어진 삶의 상태를 감지하고 결단하는 심미적 감수성이며, 그것은 근원적으로 상황적이며 역동적인 것이다.
크억. 뜻도 모르고 수도 없이 보았던 단어인 인仁이 이런 놀라운 의미였다는 말인가. 학교에서 젠장 제대로 가르쳐보려고 시도는 했나? 내가 전혀 안 들었나? ㅋㅋ
암튼, 주어진 삶의 상태를 감지하고 결단하는 심미적 감수성이라니 아름다운 말이다. 생각이 뚱딴지 같이 켄트 벡이 라는 미적인 감각(aesthetic sense)이란 표현을 쓴다는 글을 본 기억으로 튄다. 코드를 작성함에 있어서도 중용이 있을 수 있으니까. 생각이 퍼지는 것은 여기서 접자.
요임금이 순임금에게 왕위를 전할 때 "윤집궐중允執厥中"이라는 이 한마디로써 치세의 모든 방편과 적통성을 부여하였다고 말한다. 그 뜻인즉 "진실로 그 중中을 잡아라!"라는 것이니, 그것은 중화민족의 대헌장과도 같은 것이다. 모세에게 배타적인 유일신관의 십계명을 내림으로써 살육적이고 복종강요적이며 독선적인 팔레스타인의 역사를 지어낸 야훼의 언설에 비하면 참으로 포용적이고 상황적이고 화평한 높은 격조의 인문세계 언설이라 할 것이다.
잘 이해가 안 가는 내용이지만, 두 가지 생각을 한다. 하나는 중용이 아리스토텔레스 생각처럼 '가운데'이기 보다는 도리어 'ing'에 가깝지 않을까 하는 얇팍한 가설, 두 번째는 이스라엘의 독선적 세계관이 미국 우방국 전체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무섭다는 점이다. 거기에 빠진 독선적 기독교인(MB처럼)은 이처럼 위대한 책 내용에 대한 거부감으로 수렁에서 빠져 나오기가 참 어렵겠다는 데까지 생각이 미친다.
주희가 불교를 통하여 인도-유러피안어계의 사유구조를 부지불식간에 흡수한 결과로 명료하게 드러나는 것이지, 결코 중화민족의 본래적 사유 패턴으로 간주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희의 배불排佛은 이미 불교적 사유의 바탕 위에 서있다. 주희의 도학은 "유교의 불교화"라고까지 혹평할 수도 있다.
'배척하려면 대상을 수용한 뒤에야 가능하다'로 해석할 수 있을까?
"대大"는 분명하게 사람이 손발을 벌리고 있는 정면상임에 분명하다. 사람을 옆에서 본 측면상이 "인人"이라는 글자인데, 사람을 옆에서 본다는 것은 객관적으로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이기 때문에 위압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정면으로 보면 그 사람에 대한여 위압감을 느끼게 되며, 더구나 북면하는 신하가 남면한 왕을 대할 때는 그의 마제스틱한 거대함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사람의 정면상이 "크다"는 의미를 갖게 된 것이다.
상형이라 두드러지게 쏙 와닿는 설명일지 몰라도 모든 한자를 이렇게 배웠다면 금새 습득했겠다 싶다. 재밌네.
맹자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이 동물과 다를 바가 거의 없다." 인간중심의 편견을 벗어날 때, 대자연의 모든 개체는 무한한 성性의 깊이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돌멩이 하나에도 매우 복잡한 성의 구조가 있다. 이것은 도道, 유儒의 차별적 세계관의 문제가 아니다. <중략> 서양언어는 예외없이 "휴먼 네이쳐human nature"가 된다. 다시 말해서 "성性"은 "nature" 이외에 다른 적당한 말이 없다. 그런데 "nature"는 분명히 동시에 문명이 아닌 대자연 혹은 천연의 자연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nature"는 "본성"과 "자연"을 항상 동시에 의미한다. <중략> 희랍인들에게 있어서 자연이란 생명이 없는 무기물의 집합체가 아니라 생명원리로서의 혼(푸쉬케psyche)을 그 자체에 내포한 유기적 자연이었다. <중략> "퓌지스"가 로마와 중세 그리스도교 세계에 와서 "나투라natura"로 번역되었는데, 그것도 "퓌지스"와 똑같이 "태어난다"는 의미의 "나스코르nascor"라는 동사에서 유래되었으며 "퓌지스"와 거의 같은 의미로 쓰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기독교 세계관에 오게 되면 신과 인간과 자연은 완전히 계층적으로 분리된다. 신은 초월자로서 자연에 내재하지 않는다. 자연은 신의 창조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인간 또한 자연의 일부가 아닌 것으로 인식된다. 인간과 자연은 신에 의하여 따로 따로 창조된 것이며, 인간은 자연외적 존재로 소외된다.
'인간중심의 편견을 벗어날 때, 대자연의 모든 개체는 무한한 성性의 깊이를 가지고 나에게 다가온다.' 어려운 말이긴 하지만, 울림이 있다. 우선 나중심부터 벗어나자. 배척하는 마음도 지우려고 노력하자. 잘 모르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거부감을 지우려고 노력하자.
공자는 '공자가어'의 '예운'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얘기를 했다.
"도대체 인정 즉,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무엇이냐? 그것은 기뻐하고, 노여워하고,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증오하고, 욕심내고 하는 일곱 가지 감정인데, 이것은 인간이 배우지 않고서도 매우 잘하는 것이다."
"불학이능弗學而能"이라는 말이 매우 중요하다. <중략> 희노애구애오욕의 칠자야 말로 우리가 말하고자 하는 "하늘이 명하는 것"의 진실이었던 것이다. <중략>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하여서는 우리는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인간을 이해하기 위하여 전제해온 서구적, 근대적 모든 인간관의 편견을 근원적으로 "메타노이아" 시킬 필요가 있는 것이다. <중략> 공자-자사가 말하는 "인정人情"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칸트가 말하는 저급한 감각소여 수준의 감성Sinnlichkeit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중략> 이성은 오히려 인간 삶의 가장 초보적인 당위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중략> 경영수학의 도사라고 하는 자들 중에는 아마 나라를 말아먹고 세상을 미혹케 하는 그런 야망에 불타있는 광인이 무수히 많은 수도 있다. <중략> 이성이라는 것은 섬세한 인간의 감성적 판단에 구체적으로 관여하지 못하는 한에 있어서는 한낱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중략> 공자-자사가 말하는 인정이란 칸트가 말하는 감성,오성,이성을 통섭하는 보다 포괄적이고 보다 능동적이며 보다 최종적인 판단의 기능일 수도 있다. 인간을 교육한다고 하는 문제는 이성만을 배양하는 것이 아니라, 이성을 포섭하는 심미적 감수성을 배양하는 것이다. 그 감수성을 공자-자사는 "인仁"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인"이란 "극기복례克己復禮"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동방인이 말하는 "정"이란 개념은 반드시 "대의大義"와 관련이 있다. 정은 의를 구현치 못하면 온전한 정이 되지 못한다.
지금까지 주입된 근대 서구 사상의 근원적 편견을 제거할 기회라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다. 중학교 때 '참교육'을 하겠다는 담임 선생이 교무실에서 따귀 맞는 장면이 뉴스에 나온 일이 있다. 전교조가 만들어질 때였는데, 20년도 더 지난 요즘에도 기존 교육사업의 거대한 왕국은 전교조를 여전히 왜곡하고 있다. 다만, 이제는 전교조가 빨갱이 집단에서 비리 집단으로 비춰지고 있을 뿐이다. 담대한 교육감이 나타난 김에 내가 기억하는 '참교육' 혹은 공자의 교육에 조금이라도 근접한 교육으로 나아갔으면 좋겠다. 만연한 왕따와 폭력 현상을 엉뚱한 곳으로 돌리는 데, 심증뿐인 주장이지만 교육사업 주체가 쌓아놓은 몰염치와 폭력성, 이중인격적 태도 따위가 주요한 요인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극기복례. 극기는 어떻게든 노력하고 있는데, 복례라니? 애초에 나에게 예가 있었나? 없었는데 어딜 돌아가지? 정과 대의는 이해할 수 있다. 중학교에서 세탁 되기 전에 나에겐 뜨거운 가슴과 정의가 있었다. 까맣게 잊고 살았지만 사라지는 건 아닌 듯하다. 아무 정보도 없는 노무현 대통령을 보고 희열하고 뜨거운 눈물을 흘렸던 점이 바로 그 증거다.
"도라는 것은 정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며, 정이라는 것은 성으로부터 생겨나는 것이다. 도의 시작은 정에 가까운 것이다. 그러나 학습을 거쳐 완성되는 종착지는 의에 가까운 것이다." <중략> "솔率"에는 선택의 의미가 들어가 있다. "길"이라는 것은 반드시 선택되어 반복적인 습성을 통하여 형성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선택된 길은 계속 끊임없이 사람이 다니고 보수공사를 해야만 유지되는 것이다. <중략> "수도修道"의 과정을 자사는 "근정近精"에서 "근의近義"로 가는 과정이라고 표현했다.
대략 이런 그림. 수도의 과정. 교육도 이런 것이 되어야 할 텐데 말얌. 그리고 선택과 반복을 내포한 길의 특성은 아키텍처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쓰임과 변화에 맞춰서 시스템을 지속적으로 보수하는 것이 숙명이란 점. 그래야 그 안에 누더기가 아닌 아키텍처가 유지될 수 있다는 점.
인간을 교육시킨다고 하는 문제는 결코 이성적 인간을 만드는 데만 그 목적이 있지 아니 한다. 이성은 상식이다. 우리가 배양해야 할 것은 정감精感의 윤리성과 심미성이다. 심미적 감성을 결여한 윤리는 독선적이고 맹목적일 수 있으며, 윤리적 당위를 결여한 심미는 나른하고 자기기만적일 수 있다. <중략> 서양의 20세기에 유일하게 형이상학적 체계를 구축한 화이트해드가 '교육의 목적 The Aims of Education'이라는 일문을 어떻게 시작하고 있는지를 한번 살펴보는 것도 매우 유익할 것이다.
"문화라고 하는 것은 사유의 활동인 동시에 아름다움과 인간적 느낌에 대한 감수성이다. 평범한 이성적 정보의 더미들은 이 문화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 아주 정보에 밝기만 한 유식자는 하나님이 만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지루키만 한 인간을 수도 있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 배양하고자 하는 목적은 특정한 방향으로 발양되는 문화와 전문적 지식을 동시에 소유하는 훌륭한 인간을 양육하는 데 있다."
고딩때 윤리가 왜 그렇게 딱딱하고 위선적인 느낌이었는지 이제야 이해가 간다. ㅋㅋ
" 아주 정보에 밝기만 한 유식자는 하나님이 만든 이 지구상에서 가장 쓸모없는 지루키만 한 인간을 수도 있다." 통쾌한 설명이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까. 지겹다.
성, 도, 교 중에서 도를 주어로 삼아 이야기한 것은, 성性을 자연Nature라 하고 교敎를 문명Culture이라 한다면 도道는 그 중간자적 위치에 있으면서 그 양자를 통섭하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도라는 것은 자연과 문명을 매개하며, 존재Sein와 당위Sollen를 통합한다. <중략> 종교는 안 믿으면 그만이고, 교회는 안 나가면 그만이다. "그만이다"라는 말은 곧 신앙의 대상은 항상 나를 떠나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사는 말한다: "도는 잠시라도 떠나 있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잊을 수있지만, 도는 잊을 수가 없다. 하나님은 떠나 있을 수 있지만 도는 떠나 있을 수가 없다. 왜냐? 떠나 있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중략> 도는 수유라도 나에게로 떠날 수가 없다. 도가 곧 나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떠날 수 없듯이, 도는 도인 나를 떠날 수 없다. 도는 나의 삶의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아니라, 나의 삶의 활동 그 모든 것에 내재하는 것이다. 도Dao를 영어로 "the Way"라고 번역하지만, "웨이way"는 길인 동시에 "방법method"을 의미한다. 도는 나의 "삶의 길"인 동시에, 내가 "살아가는 방법"이다. 하나님은 믿음의 대상이지만 도는 믿음의 대상이 아니다. 나의 존재의 방식이다. 도는 내가 살아있는 한에 있어서는 나의 몸, 그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다. 하나님이나 예수님을 믿는 것은 쉴 수가 있고, 교회 나가는 것도 쉴 수가 있고, 기도나 성경공부도 쉴 수가 있는 것이지만, 도는 쉴 수가 없는 것이다. 삶의 모든 순간에 내재하는 것이다. <중략> 하나님은 요청의 대상이 아니라 내 몸에 내재한다. 아니 내 몸 그 자체이다. 내 몸의 모든 활동에 있어서 도를 구현할 때 하나님은 요청의 대상으로서의 필요가 없이 자연스럽게 내 몸에 구현되는 것이다. 차를 마실 때도 茶道가 있고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할 때에는 跆拳道가 있고, 먹을 때도 먹는 도食道가 있고, 잠잘 때도 수면의 도가 있으며, 섹스를 할 때도 색色道도가 있다. <중략> 하나님을 믿는 것보다 도를 실천하는 것이 훨씬 어렵다. 하나님은 기도라는 언어를 통하여 매개되지만 도는 언어를 매개로 하지 않는다. 몸으로만 전수되는 것이다. 따라서 도는 믿는 것이 아니라 닦는 것이다. 도를 닦는다는 것은 곧 몸속에서 하나님을 배양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닦는 것이다. 하나님은 몸속에서 완성되어 가는 그 무엇이다. 하나님은 고정된 존재가 아니고 끊임없이 생성되어가는 과정이다. 하나님은 몸의 고정태가 아니며, 몸의 끊임없는 가치평가the valuation of Mom라고 할 수 있다. <중략> 나의 몸을 하나님화하는 과정은 일차적으로 나 자신에게 부여되는 천명을 홀로, 고독하게 구현하는 것이다. 고독하게 구현한다는 것은 나의 존재의 책임을 나 홀로 걺어진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의존의 대상이 되면 하나님이 아니다. 하나님은 나의 몸의 비젼이며 이상태이다. 그것은 자기생성적이며 나의 몸의 과정에 끊임없이 참여하는 가치평가이며 새로움과 탈바꿈을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며 창진이다. 이 모든 과정이 홀로 있을 때,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고독속에서 선택되는 것이다.
3월 6일 다시 메모 정리
중中은 천하의 대본大本이다. 여기 천하라는 것은 천지와는 구분되는 것으로 인간세human society를 지칭한다. 중은 인간세의 큰 근본이다. <중략> 조화Harmony라는 것은 현실태이기보다는 끊임없이 지향되는 달성의 과정이다. 그것은 부조화의 현실을 인정함으로써만 가능해지는 것이다. 부조화가 없이는 조화가 없다. <중략> 문명에 대한 우리의 인식이 "중용"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인간의 자질구레한 덕성태들의 중간항목을 찾아 행복해재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문명에 대한 절제를 통하여 천지와의 조화를 이룩해야만 한다는 당위성 때문이다. <중략> 자사는 그들의 문명적 행위에 대하여 책임을 묻고 있는 것이다. 센다이 앞바다의 쯔나미도 후쿠시마 원전이 없었다면 그토록 큰 비극을 초래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자연재해보다 인위재해가 훨씬 더 크다는 것을 입증한 것이다. 그렇다면 원전을 만들지 않고 사는 문명의 방식을 우리는 힘써야 할 것이다. 그것은 우리의 심성의 문제이며 정감의 문제이며 "중절中節"의 문제이다.
부조화가 없이는 조화가 없다. 멋진 말이다. 현실에서 빚어지는 부조화를 자연스럽게 수용하라.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데 노력하라.
제 2 장 시중장 時中章
우리가 조심해야 할 것은 공자는 군자와 소인을 치자와 피치자의 관계라든가, 신분의 차이라든가, 부의 소유의 차이에 의하여 외면적으로 구분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공자의 위대성은 인간을 보편적으로 바라보았다는 데에 있다. <중략> 고대사회의 사상가로서는 찾아보기 힘든 덕성이다. 희랍의 모든 사상가는 노예제를 긍정한 위에서 평범한 시민을 이야기한다. <중략> 서양의 보편적 인간관은 실제로 미국의 노예해방 이후에나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이다. <중략> 소인은 계급적으로 구분되는 특수 인간부류가 아니라, 군자가 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군자가 되지 못하는 인간일 뿐이다. <중략> 군자와 소인은 어디까지나 가변적인 통합개념이다. 군자가 소인이 될 수도 있고, 소인이 군자가 될 수도 있다. 따라서 군자도 중용을 하고, 소인도 중용을 한다. 그런데 군자의 중용은 무엇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엇이냐? 그 둘은 어떻게 다르냐? 어떻게 구별되는 것이냐? 공자는 말한다. 군자의 중용은 시중時中이고 소인의 중용은 무기탄無氣憚이다. 공자의 언급은 천하에 둘도 없는 명언이라 할 수 있다.
좋은 내용이라 줄을 쳐 놓고 보름이 지나니 내용이 가물가물하다. 제길.. 한번에 이해할 내용도 아니니 일단 메모를 한번 답습하는 데 만족하고 다시 익히자.
제 3 장 능구장 能久章
핵심은 그의 인격에 우러나오는 능구에 있다. 지속할 수 있음에 있다. 지속하지 않으면 그것은 중용이 아니다. 인생의 목표는 영원이나 불멸이나 불사나 불변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언어들은 모두 종교적 언어이며 속임수에서 우러나온 방편적 픽션의 언어들이다. 인생의 진리에 영원불변은 없다. 인간은 죽으면 끝이다. 아니, 죽어도 이름을 역사에 남길 수 있다. 그러나 그것도 영원한 것은 아니다. 결국 잊혀지고 만다. <중략> 그럼 인간이 믿고 살아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삶의 "지속태"일 뿐이라고 공자-자사는 말한다. <중략> 지속이란 불변의 아니라, 변화이며, 시간 속에서의 유지를 말하는 것이다. <중략> 공자의 말씀속에는 허황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의 지속을 추구하라는 당부가 들어있다.
시중과 능구. 한자어로 쓰니 간결하여 우리말보다 기억하기에는 좋다.
허황된 진리를 추구하지 말고 구체적인 삶의 지속을 추구하라.
제 4 장 지미장 知味章
과, 불급은 도가 불행하고 불명한 사태에 대한 이유로서만 제시된 것이다. 중용에 대한 적극적인 규정성은 과, 불급이 없는 소극적인 상태가 아니라 바로 "맛을 아는 심미적 경지"에 있다고 본 것이다. <중략> 맛인 예술이나, 인품이나, 문학이나, 과학이나, 논리, 그 모든 것에 적용되는 것으로 매우 경제적인 스타일을 형성하는 심미적 감성이다. 맛을 아는 숙달된 문장가는, 맛을 아는 숙달된 요리사가 음식의 재료를 낭비함이 없이 곧바로 최상의 맛을 내듯이, 단어를 낭비하지 아니한다. 맛을 아는 의상 디자이너는 천을 허비하지 않는다. 맛을 아는 장인은 언제고 주어진 조건에서 최상의 작품을 만들어낸다. <중략> 따라서 교육의 궁극적인 목적은 "맛"에 있는 것이다. 어떻게 맛을 아는 인간을 배양하느냐에 문명의 존재이유가 있는 것이다. "맛"은 "멋"이며, "힘"이다. <중략> 절제없는 맛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중략> 맛은 인간의 몸과 마음의 궁극적 도덕성이다. <중략> 맛은 시중이다. 맛은 전문가의 특권이다. 다시 말해서 수신의 결과로서만 달성되는 것이다. <중략> 맛은 교육의 정점이며, 교육의 특수성과 일반성을 통합하는 것이다. 맛은 전문성을 문명에 제공하는 끊임없는 문화이다.
제 5 장 도기불행장 道基不行章
인간은 욕망의 주체이기 전에 도덕의 주체이며, 원죄의 불완전한 존재이기 전에 완전 즉 성聖의 가능성을 내포한 하학이상달의 위대한 존재이다. <중략> 우리가 재건해야 할 철학은 인간의 정면을 바라보는 것이다. 인간을 신성한 존재로서 재건설하는 것이다. <중략> 인간을 온전한 생명으로서 바라보는 것이다.
5장은 기독교인들이 보면 싫어할만한 내용으로 가득차 있지만, 교인들의 논리보다는 월등히 설득력이 있다. :)
제 6 장 순기대지장 舜基大知章
권력은 긍정적인 창조의 맥락에서 발휘되어야지 부정적인 콘트롤의 맥락에서 발현되면 안된다. <중략> 지라는 것은 인식론적 탐구라기보다는 살아가는 데 필요한 실천적 앎이다. 앎이란 물론 나 이외의 환경세계에 대한 탐구를 내포한다. 앎은 나 자신에 대한 앎과 나를 둘러싼 세계에 대한 앎을 포섭하는 것이다. 그런데 앎의 방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덕성은 호문好問이다. 호문이란 앎이라는 행위에 있어서 나의 존재를 규정하는 모든 격식을 타파하고 겸손하게 가슴을 여는 것이다. 지식은 선험적인 것으로 다 충족되지 않는다. 서양사람들이 "선험적 형식"을 중시하게 된 것은 그들의 지식추구방식이 실천적 앎에 관한 것이 아니라 앎 그 자체에 대한 인식론적 탐구였기 때문이다. "호문"이란 끊임없이 가슴을 열고 타인에게 자문을 구하는 것이다. <중략> 묻되 형이상학적 현리에 심취하지 말고 가깝고 비근한 실생활의 말들을 살피기를 좋아하라! <중략> 남들보다 대학교를 10년 더 먼저 나온다 한들, 10년 더 발리 학문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요, 10년만큼 더 많이 이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1년 더 빨리 출세하는 것도 아니다. <중략> 어떤 질문 즉 태제가 제시되면 그것에 관련된 모든 양극적, 대척적 상황을 다 충분히 고려해본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서 중용이란 양단의 중앙이 아니라, 모든 극단의 상황들을 충분히 고려해보고 그 숙성된 상황변수 속에서 자연스럽게 우러나오는 결단이라는 뜻이다.
부정적인 콘트롤이 아니라 창조의 맥락. 어렵지만 또 실천해볼 항목이다.
제 7 장 개왈여지장 皆曰予知章
인간의 가치는 끊임없는 향상向上에 있다.
'인간의 가치는 끊임없는 향상向上에 있다'. 무섭지만 매력적인 말이다.
제 10 장 자로문강장 子路問强章
용기있는 사람들은 흐르는 경향이 있다. 용기도 반드시 화和를 전제로 해야만 진정한 용기가 된다는 것이다. 결국 공자는 용기를 중용의 맥락 속에서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제 11 장 색은행괴장 索隱行怪章
결국 상식적 일상언어로 환원되어야 하는 것이다. 마치 그 속에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뛰어넘는 비밀이 들어있듯이 색은하는 것은 우매의 소치일 뿐이다. <중략> 자연스럽게 알려지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억지로 알리기 위하여 온갖 지랄발광을 하다보면 근원적으로 사회모랄을 파괴하는 짓까지 서슴치 않게 된다.
제 12 장 부부지우장 夫婦之愚章
사람은 단독자로서의 인人이 아니다. 인간人間일 수밖에 없다. 인이 되기 위해서는 수없는 간(사이)이 필요한데, 그 간을 요약하면 오륜의 간이 된다는 것이다.
인간 관계의 요약이 오륜의 간.
제 13 장 도불원인장 道不遠人章
모든 존재에 관한 법칙이 그 존재 자체에 내재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중략> 우주의 법칙은 우주 자체에 내재하는 것이지, 우주 밖에 있는 어떤 존재가 그 법칙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중략> 도끼자루를 자르는 법칙이 도끼자루 자체에 내재하듯이, "사람을 다스린다"하는 그 모든 법칙이 사람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있는 것이다. <중략> 스스로 고치기만 하면 더 이상 다스리려고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스림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자발적 개선을 목표로 해야 한다. <중략> 공자는 서恕를 말했지 충忠을 말하지 않았다. 서라는 것은 문자 그대로 여심如心이며, 나의 마음을 타인의 마음에 이입하여 같이 느끼는 공감 상태를 의미한다. 공자는 인仁의 본질인 서에 있다고 보았다. 서라는 것은 실제로 요새말로 하자면, 인간에 대한 사랑이며, 보편적인 가치관이며, 인류애를 의미한다. <중략> 우리가 깨달아야만 할 중요한 인간학적 사실은 아가페를 빙자한 사랑의 폭력에 관한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타인도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다. <중략> 대부분의 기독교국가 제국주의가 개발도상 국가들에게 이런 짓을 해온 것이다. 사랑은 나를 기준으로 하는 "베품"이 되어서는 아니 된다. <중략> 공자-자사는 언행일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단지 언은 행을 돌보고 행은 언을 돌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중략> 언은 언 자체로 독자적 가치를 지니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행으로 연결될 때만이 참다운 의미를 지닌다고 보는 것이다.
말은 행동이 수반될 때 참 의미를 지닌다.
제 14 장 불원불우장 不怨不尤章
군자는 그 자리에 처하여 그 자리에 합당한 행동에 최선을 다할 뿐, 그 자리를 벗어난 환상적 그 무엇에 욕심내지 않는다. <중략> 오직 자기 자신을 바르게 할 뿐, 타인에게 나의 삶의 상황의 원인을 구하지 아니 하니 원망이 있을 수 없다. <중략> 군자는 평이한 현실에 거하면서 천명을 기다리고, 소인은 위험한 짓을 감행하면서 요행을 바란다. <중략> 문명의 주체인 인간은 "자기를 바르게 하면서 나의 삶의 모든 책임을 타인에게서 구하지 말아야 한다."
소인은 딱 나구만.. ㅡㅡ;
제 15 장 행원자이장 行遠自邇章
어찌하여 가까운 데, 낮은 데를 버리고 먼 곳과 높은 곳만을 바라본단 말인가? 하느님은 높은 데 있지 않고 낮은 데 있으며, 천국은 먼 곳에 있지 않고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도대체 왜 모른단 말인가?
제 16 장 귀신장 鬼神章
귀신이란 음양의 소장消長일 뿐이다. <중략> 그렇다면 만물에 귀신이 없는 것이 어디 있을 수 있겠는가? <중략> 다음과 같은 주희의 말을 한 번 더 살펴보자! 귀신은 단지 기氣일 뿐이다. 그런데 기라는 것은 끊임없이 움추렸다가, 폈다, 갔다, 왔다 하는 것이다. 천지지간에 기가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까 하느님도 기일 뿐이다. 사람의 기와 천지의 기는 항상 연속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사이에 단절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것인데, 인간이 단지 그 연속성을 눈으로 인지하지 못하고 살아갈 뿐이다. <중략> 대저 생하는 것은 반드시 죽는다. 이것은 모든 유기체의 운명이다. 죽게 되면 반드시 흙속으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귀라고 한다. 그러나 혼기는 하늘로 돌아간다. 이것을 일컬어 신이라 한다. 그러기 때문에 귀와 신을 합하여 꼭 같이 제사지내는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선왕의 가르침의 지극한 것이다.
제 17 장 순기대효장 舜基大孝章
효를 자식이라는 약자의 부모라는 강자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으로 이해를 해왔고, 할고割股(허벅지 살을 베어 료친), 단지(손가락을 잘라 위독한 부모님 입에 피를 흘려드리고 남은 손가락은 죽을 끓여 드린다) 등의 터무니없는 자해행위를 효성의 극진한 행동으로 예찬하는 과거 형식주의 도덕의 유폐가 아직도 상존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중략> 귀신이란 인문세계의 역사성을 확보하기 위한 장치인 것이다. 나라는 유기체는 어김없는 생멸의 과정을 거친다. 나라는 단위생명은 "단절"이다. 그러나 그 단절은 나의 단절로써 종료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소생所生으로써 연속된다. 나의 소생은 일차적으로는 나의 자식이 될 것이요, 내가 역사 속에 남긴 유업일 수도 있다. 이 역사적 단절을 메워주는 "풀칠" 같은 것이 "귀신"일 수도 있다. 즉 내가 죽으면 나는 귀신이 되어 제사의 대상이 됨으로써 하대의 가족과 당분간 같이 머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중략> 몸속 자궁에서 태아를 키우고, 몸 밖으로 태아가 성숙하여 나왔을 때부터 젖을 먹인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젖을 먹인다"는 현상은 내 몸의 요소를 직접 자식에게 분유分有시킨다는 뜻이다.<중략> 젖에 의존하는 것은 생존의 가능성을 높였지만, 또 그만큼 독립성이 약해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또 젖이라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포유류는 많은 개체를 일시에 탕생시킬 수는 없다. <중략> 젖을 통해 "한 몸"이라는 기나긴 의식적 체험기간을 거치는 포유류에 있어서 비로소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랑"의 감정이 시작된 것이 분명하다. <중략> 인간이 태어나서 엄마품에서 젖을 먹고 보호를 받는 기간이 최소한 3년은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찌 부모님이 돌아가셨을 때 3년상을 아니지내고 딴짓을 하면서 편히 살 수 있느냐고 반문하는 것이다. <중략> 절대적 의존의 체험이라 말할 수 있는 효의 시기를 거친다. 의식의 언어적 분화가 일어나가 전에 이미 갓난아기는 순결하게 "절대적 타자"를 체험한다. 이 절대적 타자는 나의 몸의 생명영양체계를 가동시켜주는 절대적 양육, 그리고 모든 위험으로부터 나를 지켜주는 절대적 보호의 비언어적 체험의 주체이다. <중략> 지식이 사회화 과정을 완료하면 엄마는 자식을 떠난다. <중략> 종교의 본질을 신앙의 대상에서 찾지 않고, 다시 말해서 역사에 드러난 문명적 개념에서 찾지 않고, 인간의 심성에 내재하는 체험으로서 그것을 말할 때 우리는 반드시 효라는 의식의 원초적 기저에 도달하게 된다. 예수는 하나님 아버지의 이상적 효자였을 뿐이다. 예수를 닮음은 효의 구현이다. 효심이 강한 조선왕조의 사람들에게 기독교는 이러한 효기독론Xiao-Christology의 심층의식을 파고 들어왔다. 이것은 다석 유영모의 생각이다. <중략> 죽은자의 권위로써 산자를 제압하는 모든 원시적 형태의 제도가 다 종교라고 말할 수 있다. 종교의 존속은 사회적 연속성의 원리를 구현하는 것이다. 나는 말한다. 아가페적 사랑은 "태양"과 "엄마"밖에는 없다. 질투와 증오와 독선의 이기적 주체인 유대인 여호와는 아가페의 리스트에서 제거되어야 한다.
효의 터무니없는 해석이 형식주의로 드러난 면을 읽을 때 직업병처럼 방법론과 감리의 행태가 떠올랐다. 공교롭게 방금 애자일 관련 강의를 듣고 왔는데, 내가 애자일에 관심을 갖은 이유가 어쩌면 형식주의자들과 대척하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3년상의 의미를 이해하니 수긍은 되는데, 실천은... 난감하다. 어찌지? 3년까지는 아니라도 흉내라도 내봐야 그 의미를 알라나?
제 19 장 주공달효장 周公達孝章
제사의 궁극적 의미는 참여하는 내가 조상의 삶의 자리를 밟아본다는 것이다. 그들이 행하였던 예를 내가 행하고, 그들이 즐겼던 악을 내가 즐기고, 그들이 존중했던 것을 내가 공경하며, 그들이 가깝게 했던 사람들과 내가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중략> 우주생명의 창조적 가치를 인간이 문명 속에서 계속 계승하여 축적해나가는 것이야말로 선이라는 뜻이다.
선善에 대해서 처음 배우는 듯한 느낌이다. 학교에선 이런 기초적인 내용을 왜 교과서에서 가르쳐주지 않을까의문이네. :)
제 20 장 애공문정장 哀公問政章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은 지知에 가깝고, 힘써 행하는 것은 인仁에 가깝고,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용勇에 가깝습니다. 이 세 가지를 알면 과연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내 몸을 어떻게 닦을 것인가를 알게 되면 타인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중략> 공자도 "인능홍도人能弘道, 비도홍인非道弘人"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주체적으로 도를 넓혀갈 수는 있으나, 도가 사람을 넓혀줄 수는 없다는 뜻이다. 이것이 사람이 하나님이 하나님다웁게 만들어갈 수 있으나, 하나님이 사람을 사람다웁게 만들어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중략> 세상을 다스리는 사람은 있으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라는 것은 있어본 적이 없다. <중략> 인간보편의 이해는 곧 하느님에 대한 앎에 포섭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즉 나의 몸속에서 나는 친親, 그리고 인人, 그리고 천天을 발견해야 하는 것이다. 즉 나의 몸은 나의 몸의 생물학적 근원인 효孝의 세계이며, 그 효의 세계에서 인간, 그 보편을 파악하며, 우리는 인간에 대한 진정한 앎을 통해 하느님, 즉 종교적 신앙의 근원인 모든 신성, 경건성, 성스러움, 신성함을 파지하는 것이다. 즉 나의 몸, 신은 친이요, 인이요, 천이요, 신이다. 모두 운을 밟고 있는 아름다운 말이다. <중략> 문제는 끊임없는 "노력"이요 "호학"이다. 이에 관하여 순자는 그의 책 수신편에서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하였다": "천리마는 하루에 천리를 간다고 뽐낸다. 그러나 조랑말이라도 열심히 가기만 하면 열흘이면 같은 목적지에 너끈히 도달할 수 있다." 문제는 가는 목적지가 명확히 있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중략> 배우지 않음이 있을지언정, 배울진대 능하지 못하면 중도에 포기하지 마십시오. <중략> 그 종착역에 도달할지 안 할지는 여기 질문의 대상이 되질 아니 한다. <중략> 인생은 과정이다. 인생의 목적이란 그 과정에 내재하는 것이다.
오늘 Self-Management 라는 개념을 들었는데, 퍼뜩 중용과 이 구절이 떠올랐다. 지인용을 알면 수신할 수 있고, 수신을 해야 타인을 다스리는 법도 알 수 있다는데... 지는 '아는 것'이 아니라 '배우기를 좋아하는 것'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배움의 지속태라고 해야 하나? 세상을 다스리는 법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또 직업병이 도저서 방법론에 대한 현장의 몰이해가 떠올랐다. 예전에는 목적지를 멀리 보고 모호하거나 막연한 사회적 통념을 기준으로 상징적으로 설정하려는 고질병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결국 시중時中 혹은 오늘 혹은 지금의 연속상에서 얼마나 행복감을 느끼는지가 관건인데 그걸 알려면 나부터 잘 알아야 한다.
제 26 장 지성무식장 至誠無息章
천지天地는 기철학적 세계관을 전재하지 않으면 이해되지 않는다. 천은 무형자이며 형이상학자이며 도道이며 혼魂이며 신神이다. 지地는 유형자이며 형이하학자이며 기器이며 백魄이며 정精이다. 천지는 음양의 기의 다른 이름이다.
제 27 장 존덕성장 尊德性章
도와 덕은 현대어(서양어)의 도덕과는 관계가 없는 것이다. 도는 언어의 문제이며 지식의 문제이며 인식의 문제이다. 덕은, 도가 어디까지나 객곽적인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라면, 내면적, 주관적 세계를 대상으로 하는 것이다. 도는 인식의 문제이지만, 덕은 "몸의 축적"에 관한 것이다. 모든 덕은 나의 몸에 습관으로서 쌓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도를 통하여 세계를 인식하고, 덕을 통하여 나의 내면적 도덕적 주체를 건설하는 것이다.
파격적으로 느껴지는 현대어 도덕과는 관계 없다는 설명으로 시작해서 명쾌한 도덕에 대한 설명은 정말 멋지고 간결하다.
제 28 장 오종주장 吾從周章
공자께서 말씀하시었다: "어리석으면서도 자기 생각만을 고집하려 하고, 신분이 낮으면서도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려 하고, 지금 세상에 태어나 지금 세상의 법도로 살고 있으면서도 옛날의 도로만 돌아가려고 하는 자들이 많다. 이와 같은 사람들은 재앙이 그 몸에 미칠 수박에 없다."
변화에 적응하려 하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먼저 떠오른다. 그들에 대한 부정적 인식에 머무르기 보다는 이를 통해서 무엇을 배울 수 있는지에 초점을 맞추려고 노력해보자!
제 30 장 중니조술장 仲尼祖述章
"소덕천류小德川流, 대덕돈화大德敦化"라는 명제도 같은 공존, 상생의 논리를 말해주고 있다. 소덕은 소덕 나름대로 유니크한 의미가 있으며, 대덕은 대덕 나름대로 포괄적인 작용이 있다는 것이다. 소덕의 작은 천류와 같은 흐름이 없이는 대덕의 거대한 돈화가 있을 수 없다. 돈화에 화化라는 근원적인 변화의 의미가 들어있다는 것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모세혈관의 충실한 작용들이 있어야 우리 몸의 대동맥의 대순환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유기체적 세계관에 있어서는 이러한 소덕과 대덕의 유기적 작용의 통합이 중요하다. 우리나라 서울 창덕궁의 대문의 이름도 "대덕돈화"에서 온 것이며, 남대문의 이름은 존덕성장(제27장)의 "돈후이숭례敦厚以崇禮"의 마지막 두 글자에서 온 것이다.
제 32 장 성지천덕장 聖知天德章
준준肫肫, 연연淵淵 , 호호浩浩는 천, 지, 인 삼재三才사상과 관련이 있다.
| 인人 | 인仁 | 준준肫肫 |
| 지地 | 연淵 | 연연淵淵 |
| 천天 | 천天 | 호호浩浩 |
공자를 인성의 구현자로서 준준하고(간곡하고 지극하다), 땅의 구현자로서 연연하고(그윽한 깊이가 있다), 하늘의 구현자로서 호호하다(드넓고 광대하다)고 말함으로써 천, 지, 인 삼재의 모든 덕성을 한 몸에 구현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다.
제 33 장 무성무취장 無聲無臭章
밤새 소리없이 소록소록 쌓이는 백설처럼 인간의 내면에 쌓이는 신독의 덕성이야말로 '중용'의 궁극적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문에선가 있었던 구절에 대한 일독한 후의 소감은?
'중용'을 읽고 "일상적 삶의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사람은 결코 '중용'을 읽지 않은 것이다. 과연 그런가 아니 한가? 이 책을 다 읽은 후에 다시 한 번 자기의 삶을 반추해보라!
각성은 있었지만, 삶의 혁명이 일어나려면 낭독과 실천을 통한 진정한 습득 과정이 필요할 듯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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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 인간의 맛 - ![]() 도올 김용옥 지음/통나무 |










